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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읽고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과 <사양>,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나는 지금까지 일본 문학을 읽어본 적이 없고 항상 한국 문학이나 헤밍웨이나 조지 오웰, 셰익스피어 같은 영미 문학만 읽었던 것 같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독서를 시작한 김에 일본 문학을 한 번 읽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일본 문학책들을 빌렸는데, 읽어보고 싶었던 책 리스트 중에서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사양>,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최종적으로 골랐다. 그 중에서도 <설국>은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노벨 문학상까지 받도록 한 작품이라고 들어서 빨리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제일 먼저 읽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설국)이었다.

 

라는 <설국>의 첫 문장은 굉장히 유명하다. 나도 어디선가 들어봤던 기억이 난다. 그냥 별거 없는데?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문장을 통해 독자들은 주인공 '시마무라'의 시선에 몰입하고, 눈 앞에 펼쳐진 설국의 풍경을 아름답게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이 소설은 내가 앞에 게시물을 작성했던 두 소설 <위대한 개츠비>나 <동물농장>처럼 되게 흥미진진하거나 엄청난 반전이 있거나 하지는 않다. 그저 눈이 굉장히 많이 내리는 시골 마을로 놀러온 부자 주인공 '시마무라'와 시골 마을 여관의 게이샤인 '고마코'의 썸타는 일상 얘기로 책의 대부분이 채워져 있다. 이 소설은 스토리보다는 아름다운 문체와 표현에 더 초첨이 맞춰져 있다. 소설의 초반부 '시마무라'는 기차에서 안이 비치는 창문을 통해 환자를 돌보고 있는 '요코'라는 여자와 노을이 지는 기차 밖의 풍경이 겹쳐 보이는 모습을 보는데, 이 장면을  

 

 비쳐지는 것과 비추는 거울이 마치 영화의 이중노출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등장인물과 배경은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게다가 인물은 투명한 허무로, 풍경은 땅거미의 어슴푸레한 흐름으로, 이 두가지가 서로 어우러지면서 이세상이 아닌 상징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었다.

 

라는 문장으로 표현하는데 굉장히 인상깊었다. 그 외에도 '시마무라'가 달이 비추는 밤에 자신의 여관방으로 들어온 '고마코'의 얼굴 뒤로 달빛이 비추는 모습을 보는 장면이나, 눈밭 사이에서 '고마코'의 새빨간 뺨이 보이는 장면이나, 후반부 마을 고치 창고에 불이 나서 뛰어가는데 하늘에서는 아름다운 은하수가 보이는 장면 등을 굉장히 아름답게 묘사했다. 스토리보다 이러한 마을 풍경이나 날씨에 대한 묘사가 자세하고 많은데, 이러한 묘사는 소설이 아니라 마치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풍경 묘사말고도 '시마무라'가 뒷산을 올라갈 때 발 밑에서 노랑 나비 두 마리가 날아오르는 장면 같은 감성적인 묘사들이 이 소설을 더 애틋하고 사랑스럽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이 소설에서 제일 인상깊었던 장면은 중반부에 '시마무라'가 마을을 떠나는 날 '고마코'가 '시마무라'를 배웅하는 장면이었다. '고마코'와 '시마무라'가 기차가 도착하길 기다리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요코'가 급하게 달려와서 '고마코'에게 '유키오'(초반부 기차 안에서 '요코'가 돌보던 환자, '고마코'의 소꿉친구)가 임종 직전이라며 빨리 오라고 얘기를 한다. '시마무라'는 '고마코'를 보내려 하지만, 가려고 하지 않는다. 그 때 '시마무라'는 '고마코'가 이전에 얘기해줬던 자신이 쓰던 일기 첫 장에 '유키오' 얘기가 있다는 걸 언급하면서 "당신이 도쿄로 팔려갈 때 배웅해 준 오직 한사람 아냐? 가장 오래된 일기에 맨 먼저 써놓은 그 사람의 마지막을 배웅하지 않는 법이 어디 있나? 그 사람 목숨의 맨 마지막장에 당신을 쓰러 가는거야."라고 말하는데, 이말이 굉장히 멋있고 인상깊었다. 그러면서도 '고마코'가 후회할 것이라며 돌려보내는 '시마무라'와, 임종을 보기 힘들어하는 '고마코'의 심정이 모두 이해가 되었다. 이 장면 말고도 '시마무라'와 '고마코'가 함께 있는 장면 중에 애틋한 장면들이 있었는데, '고마코'가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을 쓰겠다며 '시마무라'의 손바닥에 좋아하는 연극이나 영화배우들의 이름을 이삼십 개 남짓 늘어놓고 마지막에 '시마무라'라고 적는 장면이나 '시마무라'가 여러 게이샤들 사이에서도 '고마코'는 바로 발견하는 그런 사소하지만 달달한 장면들이 굉장히 감성적이었다. 그러면서도 둘이 서로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도 가까워진듯 가까워지지 못하는 모습들이 애틋하게 보였다.

 

 후반부에서는 불이 난 고치 창고 앞에서 '시마무라'는 '고마코'와 함께한 시간을 회상하지만, 이제는 '고마코'를 떠나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사람들 눈을 의식해서 '고마코'에게서 떨어져 불길에서 도망치던 아이들 뒤로 섰다. '고마코'는 고치 창고 2층에서 떨어진 '요코'를 구하기 위해 화재현장으로 뛰어들고, 그 장면을 본 '시마무라'는 '고마코'에게 다가가려다 다른 사내들에게 떠밀려 휘청거리고 "발에 힘을 주며 올려다본 순간, 쏴아 하고 은하수가 시마무라 안으로 흘러드는 듯했다."라는 문장으로 소설은 끝난다. 허무한 결말이다. 하지만 허무한 내용이 이 소설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소설 내내 '시마무라'와 '고마코' 외에는 제대로 설명되는 인물도 없다. 아니, 그 두 사람도 다른 소설에 비하면 자세히 설명이 나오지도 않는다. '시마무라'의 아내는 어떤 사람인지, 왜 가족들을 두고 혼자 여행을 다니는지, 별 다른 설명도 없다. 주인공은 서양무용에 대한 글을 쓰지만 정작 서양무용을 본 적이 없다. 두 사람의 관계도 그렇다. 서로 사랑하는 듯하지만 사랑하지 않는다. 아무렇지 않은것 같지만 아무렇지 않지 않다. 모든 것이 애매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애틋한 소설, 일본스럽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심미적인 소설, <설국>이다.